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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영묵의 테마가 있는 여행 속으로] 아름답고 맛있는 여행…행복감이 절로

공연 극장 찾는 일은 피곤했지만…힘찬 율동의 민속춤 잊을 수 없어 마테성당·켈러트 언덕 풍경 압권…소시지·햄 그리고 맥주의 즐거움 오스트리아에서 헝가리 부다페스트까지는 버스로 약 3시간. 체코에서 오스트리아 비엔나까지 거리의 약 반 정도였으나 오스트리아의 물가 때문인지 오히려 더 비쌌다. 그러나 부다페스트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니 이번에는 택시운전수 둘이 달려와서 자기 차를 타라고 가방을 서로 뺏으려 했다. 그런데 헝가리에서 첫 번째 실수를 했다. 요금을 따지고 정한 다음에 타는 것을 깜박했다. 그래서 그만 30유로를 지불했다. 나중에 보니 약 15유로면 충분했다. 호텔에서 여장을 풀기 바쁘게 나는 로비로 내려가서 헝가리 민속춤을 공연하는 극장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항상 헝가리하면 경쾌하고 힘찬 프란츠 리스트의 헝가리 광시곡을 연상하며 또 거기에 맞추어간 장화를 신고 힘찬 율동의 민속춤을 춘 것을 결코 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호텔에서 표 예약을 하고 나니 공연시간에는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시내 관광도 할 요량으로 호텔을 나서 전차를 탔다. 그리고 시내의 중심지인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을 기린 루스벨트 광장에 내렸다. 그런데 공연극장은 유명한 곳일 것이고 쉽게 찾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는 나의 큰 실수였다. 이 사람은 이리가라, 저 사람은 저리가라 하는 바람에 지쳐있는데 마침 경찰차가 서 있었다. 그 경찰 역시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마침 길가에 서있던 택시운전수를 불러 물어본 것 같다. 이 택시 운전수 오케이 오케이 하더니 우리를 태운 후 다뉴브강 건너 다시 말해서 페스트 신시가에서 구시가인 부다 쪽으로 다리를 건너갔다. 그러더니 좀 작은 고궁 같기도 한 건물에 내려놓고 가버렸다. 그런데 왠지 조용했다. 텅 빈 홀에 한 직원이 앉아 있다. 표를 보이고 좀 들어가서 건물을 구경하자니 놀라면서 입장권을 가리키며 설명을 한다. 어떤 요일은 이곳에서, 어떤 요일은 페스트 어디에서 하는데 오늘은 여기가 아니니 빨리 다른 곳으로 가보란다. 그날 정말 택시타고 이곳저곳 헤매느라 꽤나 혼이 났다. 그러나 헝가리 민속춤 구경으로 고생하고 지친 몸은 충분한 보상을 받은 듯 했다. 정말 너무 좋았다. 다음날 아침 나는 어제 길에서 너무 시간을 보냈기에 오늘은 마음대로 내리기도 하고 타기도 하는 관광버스를 타기로 하고 호텔을 나섰다. 또한 호텔 여직원에게서 헝가리의 특별하고 맛있는 메뉴를 적어 주머니에 넣는 것도 물론 챙겼다. 다시 루스벨트 광장에서 내려 관광버스를 계약했는데 판매안내원이 20대 초반 쯤으로 꽤나 유창한 영어실력을 가진 청년이었다. 그래서 가장 궁금했던 중의 하나인 헝가리라는 나라 이름의 기원에 대해서 물어 봤다. 사실 나는 헝가리는 한나라 황제가 미녀 왕소군을 바쳐야할 만큼 강성했던 흉노족이 종국에 한족에게 쫓겨 서쪽으로 도망가서 세웠다고 들었으나 얼굴이나 몸매를 보거나 그들이 프란츠 리스트의 헝가리안 랩소디에 깔려있는 힘찬 민요에 맞추어 추는 춤을 보건데 과연 흉노족의 후손인지 납득이 잘 안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청년은 꽤나 역사를 아는 듯 했다. 헝가리에는 신석기, 청동기 시대가 있었고 유물도 발견되나 다뉴브강 이북의 독일과 마찬가지로 켈트족이 기원전부터 수백 년 동안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단다. 그러다가 AD100년경에 로마에게 정복당하고 로마의 문명, 다시 말해 원형극장, 도로 교량, 배수시설 유물로 추정컨대 인구 3만 명의 시대가 열렸다 한다. 그 후 시대가 흘러 로마의 융성함이 기울 때 즈음해서 흉노족의 침입이 있었다 한다. 그 당시 로마제국의 유럽세계에서 동쪽의 흉노 놈들이 나타나는 곳이라고 불리던 것이 그냥 굳어져 나라 이름이 헝가리가 됐다는 설명이었다. 그 후 7세기쯤 유목민인 마자르족이 게르만족과 동맹을 맺고 로마를 쫓아내고 나라를 세웠고 그 후 아르파트가 지휘하는 7개의 마자르족이 부다페스트에 정착, 오늘의 헝가리를 세웠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이나 또 자기가 알기로도 국가의 원천을 마자르족이 세운 나라라 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로마교황 칙령으로 왕이 인정받고 10세기에 기독교로 개종이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헝가리의 역사는 7세기부터라고 해야 한다는 단서를 부치기는 했다. 또한 17세기 150년간 터키의 정복 시절도 언급했다. 다시 한번 우리는 역사를 세계의 눈으로 보지 않고 우리 눈으로 보면서 한국의 형제국이니 어쩌니 하는 것이 우물 안 개구리 같고 문제로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서 에스토니아 사람들이 그들의 역사를 덴마크 지배시대, 독일기사단 지배시대, 스웨덴 지배시대 등으로 받아들이기도 하고 흉노 놈들이 나타나는 곳이란 이름을 그대로 나라 이름으로 받아들이는 그들의 역사인식이 우리의 한의 역사 인식, 과대포장, 우리 눈으로만 보는 왜곡된 역사관을 생각하면서 좀 창피한 생각이 들었다. 관광버스의 첫 번째로 우리는 페스트 국립 오페라극장 앞에서 내렸다. 그리고 뉴욕의 42번가라기보다는 서울의 대학로 같은 곳을 어슬렁어슬렁 거렸다. 연극 극장, 좀 작은 규모의 오페라 공연장, 발레공연 등의 건물들이 모여 있었고 조그마한 카페에서 극작가, 연출자쯤 돼 보이는 사람들이 뭔지 모를 열띤 논쟁으로 떠들썩했다. 분위기가 좋아서 에스프레소 커피 한 잔 주문했고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여자가 차를 서브했다. 그리고 다시 버스를 타고 다뉴브강 건너 부다 쪽에 갔을 때 그 아름다움은 말이나 글로서 다 설명이 안 된다. 그저 집사람이 사진 찍기에 너무 바빴다고나 할까. 특히 성당의 언덕에 있는 마테성당(Matthias Church)과 그 주변 그리고 겔러트 언덕(Gellert Hill)의 풍경은 압권이었다. 그래서 또 한번의 실수(?)를 했다. 아주 멋진 길가 오픈 카페에 앉아 호텔에서 적어준 종이를 내밀면서 음식 오더를 했다. 하나는 돼지만두에 그래비(gravy)를 부었다할까. 그리고 또 하나는 닭 스튜(chicken stew) 같은 것이었다. 맛은 그저 그랬고 물 한 병에 맥주 한 병이 전부였다. 그러나 계산서를 보니 60달러가 넘었다. 비싼 자릿값을 치룬 것 같았다 집사람이 갤러트 언덕 경치구경에 너무 빠져, 언덕 위에서 사진 찍으랴 구경하랴 하는 바람에 다뉴브강에서 배타는 것은 돈을 주고도 못 탔다. 그리고 다시 페스트로 돌아와 국회의사당 건물을 돌아보니 너무 지친 것 같고 점심에 바가지를 쓴 것 같아 옆에 시청 홀 상가를 구경하다가 소시지ㆍ햄 전문집에서 약간의 소시지와 빵 그리고 호텔 앞에서 헝가리 맥주를 사서 호텔방에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모두 5유로도 안 들었는데 아주 맛있었고 훌륭한 저녁이었다. 호텔방에 누워 있다. 피로하다. 그러나 행복한 피로다. 그리고 꼭 다시 오겠다며 다짐하면서 잠에 빠졌다.

2010-07-21

[작가 이영묵의 테마가 있는 여행 속으로] 수준 높은 관객…수준 높은 예술

하루라도 더 있다 갔으면 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오스트리아 비엔나로 향했다. 값도 싸고 무거운 가방을 기차역에서 오르락내리락 할 필요도 없는 버스를 택했다. 시니어 디스카운트를 하니 18달러였다. 음료수도 주고 영화는 말을 몰라 포기했으나 싸고 편했다. 빈부차일까. 체코보다 오스트리아 도로가 더 잘 관리된 듯 했고 국경을 넘는 데도 같은 유럽연합인데도 좀 까다로운 듯 했다. 비엔나 버스 터미널에 도착해서는 대기 택시가 없어 무거운 가방을 끌고 이곳저곳 다니느라고 고생을 했다. 호텔에 여장을 푼 후 곧바로 도심 번화가로 가려고 지하철을 탔다. 성 스테판 성당 앞이었다. 지하철에서 나오니 옛날 궁정음악인 옷차림에 각 음악회 표 장사가 여러 명 눈에 띄었다. 흥정을 해 보았다. 60유로짜리 티켓을 20유로면 사겠다고 했다. 크로아티아에서 왔다는 표 파는 사람이 하도 재미있어 그냥 장난삼아 한 말이었다. 그런데 웬걸 재수있게 30유로로 샀다. 표 장사가 극장에 한참 전화한 후였는데 내가 막 취소된 것을 잡은 행운이란다. 표를 샀으니 느긋하게 성 스테판 성당에 들어갔다가 그만 압도당하면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12세기에 지었다는 성당 규모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조각, 벽유리 그림, 역사 유물이 대단했다. 거기다 출생?사망신고를 통괄하는 사회적 중심이었고 모차르트의 출생신고도 여기서 했다 한다. 한국 분들이 떼 지어 오고 있었다. 누가 와서 인사를 한다. 북버지니아 우리 동네분이다. 신부님의 인솔로 대부분 뉴욕에서 왔는데 자기가 끼어 왔단다. 아직도 음악회 시작까지 시간이 있다. 우리 부부는 이곳의 전통음식점 최고식당으로 1905년에 문을 연 휘글뮬러(Figlmueller)라는 식당으로 갔다. 그 유명한 메뉴 슈니젤(schnitzel)-돼지고기를 아주 엷게, 빈대떡보다도 더 크게 썬 것을 돈가스처럼 튀긴 음식-을 먹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 음식이 입으로 들어갔는지 코로 들어갔는지 몰랐다. 갑자기 비가 쏟아져 문 앞에 줄 서있던 사람들이 식당으로 몰려 들어와 앉아있는 우리보다 서 있는 사람들이 더 많았고 그들이 원숭이 땅콩 까먹는 것 구경하듯이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식사 후 가격 흥정으로 횡재한 로열 비엔나 오케스트라의 요한 스트라우스와 모차르트음악회에 갔었다. 격조 높은 분위기에 아주 좋았다. 다음날 하루는 전기차, 버스, 지하철을 타며 비엔나를 돌아 다녔다. 그 웅장한 건물은 아무리 보고 또 보아도 끝이 없었다. 그런데 언제인가 역사가들이 세계의 외교는 이곳 비엔나에서 춤춘다고 했던가 어찌 되었던 비엔나 여인들은 게르만족으로는 독일 사람보다 키가 작고 아담하다. 그래서 그들의 발레나 왈츠 춤이 더 아름다웠을지도 모르겠다. 그 음악과 춤의 유혹 때문이었을까. 1920년대부터 옆 나라 독일에서는 애국이다, 정치가 어떻다, 그리고 나치가 시작되는 소용돌이 속에서 그들은 정신적인 피난처를 섹스(sex)에서 찾았는지도 모르겠다. 정신분석학의 대가 프로이드 교수가 이곳 비엔나대학에서 당시로서는 엄청난 논리를 전개하기도 했고 벨베르데르(Belvedere) 궁전 미술박물관에 있는 구스타브 클림트(Gustav Klimt)의 그 유명한 키스(Der Kiss)를 비롯한 그와 그 유파의 에로틱한 그림들을 꽤나 많이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하기야 그 알뜰한 살림꾼 이승만 박사의 부인 프란체스코여사도 테니스 선수와 결혼했다가 이혼을 했다 하니 그 당시의 풍토를 짐작할 만하다. 요한 스트라우스의 그 유명하다는 비엔나 숲을 가보았다. 그저 그랬다. 그러나 그곳으로 가는 길에 레나(Renner)라는 음식점에서 전통 비엔나 스프(soup)라는 갈비탕 비슷한 스프와 소의 간-돈가스처럼 프라이한 것 같은 것-을 즐겼다. 값도 각각 약 10달러로 저렴했고 꽤나 맛이 있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나의 비엔나 하이라이트…. 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하는 발레 메이어링(Mayerling)이라는 것을 감상했다. 매년 연초에 TV를 통해 전 세계에 전파되는 요한 스트라우스의 꿈의 왈츠가 공연되는 바로 비엔나 오페라 하우스에서 보았다. 그 공연 내용이야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을 만큼 훌륭했다. 그러나 입장료는 워싱턴의 케네디센터보다 비쌌다. 특별석, 로열석이 아닌 일반석 중 괜찮은 자리였는데 약 180달러였다. 그런데 휴식시간에 케네디센터에서는 여인들이 등이 다 터진 희한한 드레스에 와인이나 칵테일 잔을 들고 떠들어대는 것과는 달리 아주 수수한 옷차림에 조용히 막이 오르기를 기다리듯 했다. 그러나 공연 중 나는 그들이 진정 공연에 몰두하는 진지함을 느낄 수 있었다. 수준 높은 관객이 있기에 수준 높은 예술이 지켜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했다. 공연장에서 나와서 돈도 많이 썼고 시간도 늦어서 저녁은 슈퍼마켓에서 (비엔나는 레드와인이 아니라 백포도주라 해서) 백포도주와 치즈, 빵, 베이컨을 사서 호텔방에서 저녁을 해결했다. 다음날은 나의 집사람을 위한 날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골치 아픈 역사다, 무엇이다 하기 전에 아름다움, 특히 자연과, 꽃을 좋아하는 집사람의 마음에 드는 하루였기에 말이다. 체코 프라하에서 각 나라 소수민족 춤에서 그만 그 춤에 황홀해서 몇 백 장의 사진을 찍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날도 몇 백 장의 사진을 찍었다. 첫째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궁인 센부룬(schonbrunn)의 정원이었다. 마차를 타고 약 30분 좀 넘게 돌았는데 진정 아름다웠다. 두 번째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비운의 공주 씨씨(Sisi)의 기념박물관에서였다. 동서양의 모든 식기 도자기 그릇이었는데 너무 예쁘다고 계속 셔터를 눌러 댔다. 나로서는 동양의 도자기전시장에 중국 것과 일본 것밖에 없는 것이 꽤나 섭섭했다. 유럽 연합이라고 하나 발트해 3국, 그리고 체코도 아직 유로화를 안 쓴다. 또 물가도 아직은 그리 비싸지 않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유로를 쓴다. 택시, 음식값 등 다른 곳에 비하면 비싸다. 그러나 검소함이 이곳저곳에서 보인다. 그러나 정을 느끼지 못할 만큼 어딘가 마음이 안 열린다. 아마도 그들의 잘 잡혀진 질서 속에서 내가 여유를 찾지 못해서가 아니면 관광지가 체코처럼 옹기종기 모여져 있지 않고 흩어져 있어 마음 들뜬 사람끼리 만나지 못해서일까? ‘차분한 기분에 나의 품격과 교양이 좀 높아진 것일까.’ 갸우뚱하며 그날 저녁도 백포도주 한 병을 비웠다.

2010-07-19

[작가 이영묵의 테마가 있는 여행 속으로] 거리마다 흐르는 음악과 예술의 도시

생기 발랄한 20대와의 만남…꿈과 활달함에 밤을 잊었고 악사·화가들의 열정에 반해 '춤의 향연' 축제 황홀감이 북유럽 여행을 마치고 일행과 헤어진 후 우리 부부는 외톨이가 되었다. 어떻게 동유럽 여행을 즐길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내가 처음 유럽에 왔을 때가 생각났다.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대통령 궁이었던 프라도 박물관을 보면서 엉뚱하게도 경복궁과 당백전을 회상했다. 1592년 임진왜란에 불탄 경복궁을 250여 년 동안 복구도 못하고 창덕궁, 창경궁으로 전전하다가 19세기 중엽을 넘겨 돈이 없어 당백전을 마구 만들어 복원한 경복궁이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졌고 창피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세계가 모두 이웃이 되는 지구촌 시대이니 이곳의 사람들, 음식 또 예술의 세계를 수박 겉핥기라도 한번 해보자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첫 도착에서 연달아 두 가지 실수를 했다. 공항에서 돈을 바꾸면 교환율, 즉 코미 숀으로 손해 보는데 얼떨결에 200달러나 바꾸어 최소한 20달러를 손해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인터넷을 너무 많이 봤든가 인터넷 광고 덕분에 모차르트의 돈조반니 인형극을 봤는데 본전 생각이 났다. 그러나 의외의 즐거움도 있었다. 발랄하고 그저 이야기만 들어도 젊어지고 즐거워지는 20대 4명을 만났다. 그래서 내가 요새 말로 쐈다. 그런데 그곳은 보통 음식점이 아니었다. 1622년 문을 열었고 버드와이저라는 맥주를 처음 만든 집이다. 그리고 그 집의 특별한 음식이 ‘꼴래노’라는 (돼지 족발이 아니라) 돼지 무릎이었다. 훈제 비슷한데 냄새는 없고 입에서 살살 녹았다. 맥주 또한 기가 막히게 좋아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입에 침이 고인다. 한국에서 온 여대생 두 명, 헝가리로 유학 온 여학생과 리투아니아 교환 학생신분인 그의 남자친구. 그들의 미래를 향한 꿈, 현실을 보는 눈, 그리고 젊음의 활달함…. 55달러 투자로 밤늦게까지 대화를 즐겼다. 다음날 아침 비대성당(St. Vitus)이라고 불리는 소위 캐슬이란 곳으로 갔다. 안보겠다고 했지만 성당 안 조각, 그림 그리고 역사적 유물이 하도 많아 또 2~3시간 감탄 속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보석, 왕관 박물관, 왕궁과 경호대 교대식 등으로 시간을 보내고 광장(hradcanske) 계단에 앉아 쉬자니 동상이 보인다. 소련의 속박에서 벗어나 체코공화국을 세운 하벨 대통령이다. 그는 대통령이라기보다는 유명한 소설작가이다. 금상첨화랄까 거리의 악사들이 음악과 보컬 음악을 들려주기까지 한다. 나중에 들으니 아주 유명한 음악 연주자들이란다. 20달러 주고 CD 한 장을 샀다. 세 번째 실수…. 언덕에서 내려다 본 프라하 구시가 전경이 너무나 아름다워 자리 좋은 카페에 앉았다. 그리고 드링크 한잔 마시고 쉴 것을 그만 맥주 한 병과 간단한 스파게티를 시켰다. 그리고 둘이서 먹은 것이 거의 45달러나 됐다. 그곳에서 구시가 중심으로 내려오는 언덕길을 구태여 설명하자면 부자들이 사는 비버리힐 가까이에 있는 로데오 거리정도 되는 곳이다. 그런데 그 시대는 번지나 문패 같은 것을 안 썼기에 집에 문양을 붙여 알렸다 한다. 두개의 태양, 백조, 3개의 바이올린 등이 문패 역할로 아직까지 남아있다. 언덕을 다 내려오니 좀 지친 것 같다. 규모가 작은 광장 바로크풍의 성당이 있고 맞은편 리히스타인 궁이라고 하는 좀 작은 궁이 있다. 떠버리 중년여인이 표를 팔고 있다. 저녁 음악회이다. 시니어 할인을 받으니 20달러였다. 그런데 레퍼토리는 이곳이 고향이고 그들에게 친숙한, 스메타나, 드보르작, 모차르트, 비발디 등의 곡을 연주하는데 공연장소인 궁 안 정원을 지나 갈 때부터 분위기에 젖어서인지 20달러 입장료가 너무 싼 것 같았다. 아주 잘 즐겼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무차(Mucha)미술박물관을 방문했다. 무차는 파리에 그림 배우러 갔다가 재정지원이 끊겨 시작한 상업, 포스터에서부터 르네상스 극장의 여배우 버나르트를 최고 인기 배우로 만들고 보석, 직물, 주방 물품에 이르기까지 그림의 장르를 넓혔으며 부를 쌓은 후 귀국해서 독립의 혼을 불어 넣은 화가다. 그래서 나치가 1940년 침공하자마자 제일 먼저 체포한 사람이다. 그의 미술을 시대별로 진열한 것을 언젠가는 시간을 두고 다시 와서 보리라 하고 오전 다리 품팔이로 피곤함을 체코의 맛있는 빵과 케이크로 때우고 그 유명한 찰스 브리지로 걸어갔다. 그리고 나는 탄성을 질렀다. 루이지애나 주 뉴올리언스의 버번스트리트 낭만이 없어진 것을 아쉬워했는데 여기 그보다 훨씬 좋은 나의 꿈으로 그려 보았던 거리가 펼쳐져 있었다. 거리에서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화가, 자기 그림을 파는 화가, 초상화 화가, 작은 액세서리 소품을 만들어 팔고, 소프라노 눈먼 여자가 노래를 부르고, 다리 받힘기둥마다 세워진 조각들. 집사람이 카메라 셔터를 계속 누르고 있었다. 정말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그곳을 떠나 올드타운 광장으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는 나에게 행운의 여신이 손짓하고 있었다. ‘국가와 소수민족의 춤의 축제’가 광장에서 막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그리스, 크로아티아, 코소보, 슬로바키아, 불가리아, 슬로베니아, 폴란드, 헝가리, 우크라이나, 세르비아 그리고 집시의 춤의 향연 등등. 거기다가 체코 출신에 조지아 애틀랜타에서 온 젊은이가 내 옆에 앉아 해설과 통역까지 해주어 진정 일생에 결코 두 번 올 수 없는 행운으로 황홀 속에서 보낸 두시간이였다. 특히 그리스, 헝가리, 우크라이나, 불가리아 등 생동감 넘친 율동 거기다 모두들 왜 그리 여인들이 예쁜지…. 본래 슬라브족에 미녀가 많다고 했다. 그리고 러시아 여인들 보다 체코 여인이 더 예뻐서 바비 인형이 체코 여인의 몸매를 땄다고 했다. 그러나 무대에서 춤추는 여인들은 정말 하나같이 미인들이었다. 내가 너무 욕심이 많은 것일까?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저녁 음악 연주가 시립음악홀(Municipal House Hall)에 있었다. 2급 좌석이 45달러짜리였다. 미국에 그런대로 오래 살아서일까, 음악연주수 준에 비추어 볼 때 이 공연 역시 너무 싼 입장료 같았다.

2010-07-16

[작가 이영묵의 테마가 있는 여행 속으로] 고성에 들어서니 햄릿 무대 느낌이…

수준높은 탐구·독립운동 열정의 나라…인간띠 만들며 독립 일구어낸 시발점 작년엔 국가수립 1000주년 기념행사…유럽의 거리, 무게의 중심 자긍심 대단 관광가이드 설명에 의하면 리투아니아는 남한 땅의 3분의 1정도이나 그래도 360만 명으로 발트 3국 중 인구가 가장 많고, 한때는 그 세력이 폴란드와 연방국으로, 러시아까지 뻗힌 적도 있다 한다. 그리고 독일 기사단이 1009년 처음으로 리투아니아에 나라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는데 작년 국가수립 1000주년 기념행사로 전 유럽이 떠들썩했다 한다. 그러니 발트 3국 중 가장 활기를 띄웠다는 말이 일리가 있는 듯 하다. 거기에 걸맞은 재미난 이야기 꺼리가 있다. 리투아니아 구시가 유네스코 보존 구역 안 다리 건너 한 블럭이 독립을 선포했다. 거창하게 나라 이름도 있다. 우즈피스 공화국이다. 그리고 다리 입구에 총 41조로 되어있는 헌법을 여러 나라말로 써 붙여 놓았다. 제 일조: 누구나 비넬레 강가에 살 권리가 있다. 그리고 비넬레강은 사람 옆으로 흘러갈 권리가 있다로 시작하여 사람은 누구나 죽을 권리가 있다. 그러나 의무사항은 아니다. 사람은 실수할 권리가 있다. 사람은 사랑할 권리, 사람은 아무도 닮지 않을 권리 등등 아주 재미있는 문구의 나열이다. 그리고 그 곳 대통령이 일년에 한번 다리에서 여권에 비자 도장을 찍어 준단다. 나는 1570년 설립되고 1579년 교황 그레고리 13세가 정식 대학으로 인정된 벨뉴스 대학에서 그러한 발상의 토양을 느낄 수 있었다. 최초의 그리고 최대의 기상대, 멸종된 소수민족에 대한 기록, 전쟁과 인간의 탄생과 죽음까지 종교적 해석의 미술 등 수준 높은 탐구의 열정이 쉽게 구소련 치하에서 정신적 속박에서 벗어나게 했다는 느낌이 들었다는 말이다. 벨뉴스 대학에서 나와 리투아니아의 영광, 수호의 공이 큰 4명의 왕이 4면에 새겨진 게디미나스 동상과 대성당을 구경하고 광장에 이르면 아주 의미 있는 표지판이 있다. 그곳이 바로 세계를 놀라게 한 벨라루스로부터 리투아니아, 라트비아를 걸쳐 에스토니아까지 수만리를 손에 손을 잡고 소위 ‘인간 띠’를 만들며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얻어낸 운동의 시발점을 알리는 표지판이었다. 또 한번 그들의 열기를 볼 수 있었다. 아름다운 구시가의 볼거리를 뒤로 하고 다음날 아침 많은 유적이 있으며 13세기까지 수도였고, 16세기까지 왕궁이 있었던 아름다운 호수 위의 도시 트라카이(TRAKAI)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유럽의 거리, 무게의 중심이라는 큰 표지, 기념탑이 있는 곳에 들렀다. 인간들이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고 산다고 새삼 느꼈다. 트라카이 중세 고성은 가리베 호수 가운데 한 폭의 그림처럼 우뚝 서있다.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오래간만에 만난 매서운 바람을 뚫고 고성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멈칫했다. 분명 명배우 로렌스 올리비에가 출연했던 영화 햄릿의 무대에 내가 들어선 느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쓴 웃음을 지었다. 상상 속에 있을 비극은 이곳에 분명 없었고 대신 호기심에 찬 관광객만 있으니 말이다. ‘글쟁이의 못된 버릇은 어찌 할 수 없다니까…’ 하며 뇌까렸다. 트라카이에서 호숫가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그 앞에 좀 특이한 지붕 모양의 집들이 있었다. 바로 몽고의 일족인 타타린족들이 왕의 경호부대로 오래 고용되어 살았다 한다. 바로 그들이 사는 마을이며, 그들이 전파한 양고기튀김(카비네이)은 이곳의 유명 음식이라 한다. 아쉽게도 먹지는 못했다. 수도 벨뉴스로 돌아와 호텔방에 누어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 꼬박 11일을 러시아, 발트3국 많이도 돌아 다녔다. 그리고 나름대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정리해 보았다. 러시아는 순수 슬라브족이라 생각했는데, 모스크바를 세운 주인공이 바이킹의 일족 유리라는 성주라 한다. 그리고 에스토니아는 헝가리부터 핀란드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핀란드 종족이라 한다. 뿐만 아니라 라트비아에 가면 독립의 상징인 자유여신상이 별 3개를 들고 서 있다. 인구 100만 명이 조금 넘는 이 땅에 3개의 종족 통합을 상징한다고 한다. 리투아니아는 엉뚱하게도 그 나라 언어가 인도의 산스크리트라니 어리둥절하다. 또 스탈린 시대 이주정책으로 발트 3국에는 거의 20 %의 인구가 러시아 사람들이다. 무국적자의 신분에서 영주권자, 시민권자로 잘들 어울려 살고 있다. 그리고 젊은 한국인들이 같이 미래를 열고 있다. 모스크바 가이드는 비교언어학 유학생, 세인트 피터스버그는 파이프 오르겐 유학생의 남편, 국경을 넘을 때 도우미는 베이스 바리톤 유학생, 발트 3국은 민속학 유학생, 나의 젊은 시절 상상도 못할 곳에서, 상상도 못할 세계에 도전하면서 미래를 열고 있었다. 밝은 미래를 보며 기쁜 마음으로 깊은 잠에 빠졌다.

2010-07-14

[작가 이영묵의 테마가 있는 여행 속으로] 발레는 귀족 전용물 아닌 전통예술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바티칸 궁전과 성 베드로 성당에 가면 입이 딱 벌어질 것 같은 그 웅장함, 미술, 조각 작품 등에 넋이 나가고 너무나 볼 것이 많고 또 그 모든 것들이 전부 대단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을 만들기 위하여 교황들은 ‘면죄부’라는 희귀한 발상까지 동원하면서 재원을 마련해야 했고 종국에는 그 부작용으로 종교개혁 발생의 한몫을 했다. 같은 맥락에서 이곳 세인트 피터스버그의 겨울궁전, 여름궁전을 보면 제정 러시아의 멸망의 이유를, 니콜라이 2세를 비롯한 황제 일가족의 비극적 최후 그리고 농노들의 열광 속에서 공산주의의 탄생의 필요성을 동감할 수 있을 것이다. 겨울궁전에 있다는 세계 3대 박물관 중의 하나인 에르미타슈 박물관의 내부, 천장의 벽화, 소장품 등 전부가 정말 대단했다. 동행했던 학교 p선배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마돈나’ 램브란트의 ‘돌아온 탕자’ 이 두 그림에 그만 넋을 읽고, 다음날 여름궁전 방문 일정을 빠지고 혼자서 다시 박물관을 가버렸다. “내가 세인트 피터스버그에 온 이유가 바로 이곳 미술품 때문이었어” 하면서 말이다. 나는 바티칸 궁전에서 방문객들이 하도 많아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를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이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를 그대로 베껴서 그린 천장 그림을 오히려 이곳에서 제대로 감상하는 즐거움을 갖기도 했다. 하지만 나의 관심은 미술, 조각품 보다는 역시 ‘발레’였다. 본래 제정 러시아 시대, 황실이나 귀족들은 그들의 문화 뿌리를 프랑스에 두었고,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프랑스 황실 전속 무용수들이 갈 곳이 없어지자, 그들을 환영하며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후 러시아 황실이나 귀족들은 얼굴의 크기, 몸매에서 그들의 슬라브족의 무용수들이 프랑스 무희보다 더 아름답고 동작이 더 훌륭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무용들이 차츰 러시아화되고 정리되어 현재의 ‘발레’를 낳았다 한다. 그리고 혁명 후 소련의 위정자들이 황제의 궁이나 공작, 백작 같은 귀족의 궁전에 노동자와 농민들을 불러들여 ‘발레’는 귀족의 전용이 아니라 우리 전부가 즐길 수 있는 것이라는 정치 선전을 하였다. 그 덕분에 러시아의 자랑스러운 전통예술로 자리매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에 와서 발레를 보겠다는 그러한 나의 꿈이라 할 키로프(현지 마리인스키)의 발레 구경은 불행하게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휴관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이랄까, 건너편 미하일롭스키 극장에서 미하일롭스키 클래식 발레단의 ‘스파르타쿠스’를 공연해, 그것을 감상하는 행운을 가졌다. 스파르타쿠스는 40여 년 전 카크라글라스와 진시몬스가 주연했던 ‘스파르타’라는 영화의 내용을 발레화한 것이다. 로마시대 노예 검투사들이 일으킨 반란과 사랑이야기로 실제 역사상 있었던 사건을 극화한 것이다. 여성 프리마돈나의 황홀하고, 아름다움이라는 일상의 발레에서 힘찬 남자 무용수들의 힘을 쏟아내는 또 다른 맛을 함께 보여주는 발레로 아주 감명 깊게 감상했다. 사실 러시아에서 스탈린 같은 소련시대 독재자들의 동상은 다 없앴으나, 레닌과 칼 막스의 동상은 그대로 남아있다. 아직도 러시아인들의 정서는 소련의 독재자들이 정치를 잘못한 것이지, 칼 막스나 레닌의 공산주의 이념은 순수하며 이상향이란 생각이 남아있다. 그리고 노예 검투사들의 반란 사건을 소재로 한 발레극은 오늘날에도 그들의 정서에 공감을 주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발레를 감상하기 전 오전에 방문했던 ‘여름궁전’은 꽃을 좋아하고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는 나의 집사람이 가장 즐긴 곳인 것 같다. 헛발을 디뎌서 불편한 다리를 절뚝거리며 열심히 돌아다니며 카메라에 그 모습들을 담기 바빴다. 정말 대단했다. 일반 골프장 20개의 넓이에 아름다운 분수와 발트해만 쳐다보기에도 바쁠 지경이었다. 나는 세인트 피터스버그에 머무는 동안 궁전 같은 백작의 대저택에서 피아노 연주를 들으며 저녁식사도 했고, 엘바강에 보트를 타며 그들의 민속춤과 민요를 감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림스키코르사코프, 무졸스키, 라흐마니노프, 차이코프스키 등 자랑스러운 작곡가를 낳은 세인트 피터스버그에 내가 너무 기대를 했었던가. 그러한 것들에 나는 별로 감명을 받지 못했다. 나는 언제가 다시 와 낮에는 에르미타슈 박물관, 저녁에는 최상급의 음악회 그리고 발레를 보리라고 다짐하면서 세인트 피터스버그의 일정을 마쳤다.

2010-07-06

[작가 이영묵의 테마가 있는 여행 속으로] 혁명 향한 고뇌는 '불후의 명작'으로

톨스토이·도스토예프스키 등 모순된 사회 보며 작품들 남겨 일광욕 즐그는 금발의 미녀들, '피의 항쟁' 과거는 아는지… H 여행사 MRS.한이 쪽지를 내민다. 푸쉬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란 시였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마라 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은 오고야 말리니 마음은 미래를 바라느니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나 지나가 버린 것 그리움이 되나니 ― 중략 -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 모든 것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또 다시 그리움이 되리라. 사실 세계는 17세기말 영국의 소위 권리장전이란 명예혁명을 시작으로 18세기는 민주적 공화제를 설립한 미국의 독립혁명, 그리고 프랑스의 낡은 신문제도, 낡은 권력을 바꾸려는 시민들의 경제적, 정치적 요구를 외치는 대혁명으로 뜨거운 시기였다. 그 와중에 정권을 잡은 나폴레옹이 19세기 초 러시아 침공과 패전으로 러시아의 젊은 장교를 포함한 많은 지식들이 프랑스 파리에 들락거리며 이 모든 혁명의 현장을 보았다. 그리고 러시아 제국의 소위 ‘농노제도’ 제도 하에서 신음하고 살고 있는 그들의 조국 모습을 보면서 고민을 시작했을 것이다. 19세기 니콜라이 고골의 ‘외투’라는 소설을 시작으로, 부유한 백작의 아들로 태어난 인도주의 실천가 톨스토이가 ‘부활’ 같은 작품을 낳았고, 한 시골 작은 마을 혹독한 소위 악질 지주로서 급기야 농노들의 반항, 폭풍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을 아버지로 둔 도스토예프스키가 인간존재 구원을 탐구하던 중 펴낸 ‘죄와 벌’과 ‘카라마조프’ 같은 소설을 남겼으며, 19세기 중엽을 지나 정치적, 사회적 조건의 전환 과정에서 이반 투르게네프는 세대간, 사상적 시각을 프리즘으로 비추어 보는 불후의 명작 ‘부자들(fathers & sons)’이란 작품을 남긴 것 같다. 러시아인들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어제’의 이야기를 들어가며, 오늘에 신음하는 농노제도하에서 ‘모순된’ 세상을 보며 내일의 ‘혁명’을 향한 몸부림을 아마도 백년 넘게 겪어 온 것 같다. 그리고 혹독하고, 깊은 신음의 굴곡이 길어질수록 좀 더 큰 반향이 필요하고 준비되었을 것이다. 나는 칼 막스의 공산주의가 20세기에 들어서 러시아에서 시작된 것이 어쩌면 운명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사실 1861년 농노해방, 1905년 피의 항쟁, 1917년 혁명의 시작으로 백군, 적군의 소용돌이를 지나 공산정권이 들어섰을 때, 열병처럼 세계는 ‘공산주의’란 신기루에 열광했다. 프랑스의 앙드레지드 같은 작가는 이상향을 러시아에서 찾으려 했고, 미국까지도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에서 자본주의 문제를 표출, 소련의 학교 교과서에 소개될 정도였고 할리우드의 많은 연예인까지도 러시아에서 그들의 낙원을 기대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일제하에서 신음하던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인간의 경쟁, 이기심, 욕심, 배신, 소유욕 등 기본적인 성격이 무시된 이러한 실현될 수 없는 이상적인 ‘공산주의’란 단지 하나의 신기루이었음이 증명된 오늘이지만 18, 19, 20세기의 인간 본연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표출되었던 그러한 러시아 역사의 현장인 세인트 피터스버그에 내가 지금 버스창 너머로 보고 있는 것이다. 엘바강에 기념비적으로 서있는 군함을 가이드가 가리키면서 1905년 러일 전정에 참전했던 오로라호란 군함이라며, 저 배의 함포가 1917년 쏘아댄 한 방의 대포가 볼세비키 혁명의 시작이 되고 제정 러시아를 무너뜨리는 시발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곳을 지나는가 싶더니 어느덧 세인트 피터스버그의 가장 번화하다는 네프스키 대로로 들어섰다. 작가 고골이 ‘그 길의 호화롭고 사치스러움에 그 길에 사람들이 들어서면, 내가 그 길에 왜 왔는지를 잊어버리고 만다’고 했다는데 그 대로변에 건물, 상가들을 보니 그 사치스러움을 알 것 같다. 한 노변 카페를 가리킨다. 러시아 혁명의 태초가 된 시인 푸쉬킨이 그 카페에서 자기 부인과 염문을 일으킨 한 프랑스 장교에게 결투를 신청, 결투를 했으나 과다 출혈로 죽었다면서 그러나 그 부인은 푸쉬킨이 죽은 후 2번이나 더 결혼을 했다 한다. ‘혁명, 이념 투쟁 속에서도 역시 인간의 사랑이야기는 떼어 놓을 수 없었구나’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구의 기후가 어찌 되었는지 세인트 피터스버그의 5월 날씨가 꽤나 더웠다. 그리고 햇빛이 내려쬐고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 공원이라고 불리는 노천에 금발의 미녀들이 백옥같이 흰 피부에 일광욕을 즐긴다며 풀밭에 쭈욱 누워있다. 참으로 평화스럽고, 아름다워 보였다. 그런데 그들은 과연 20세기에 있었던 러시아가 아닌 소련이란 이름의 공산주의라는 꿈을 향한 몸부림에서 벌어진 엄청난 비극의 과거들을 알고나 있는지….

2010-07-05

[작가 이영묵의 테마가 있는 여행 속으로] 어린 시절 향수 '추억의 고향'으로

나는 지금 모스크바로 향하는 비행기에 앉아있다. 그러면서 60년 전의 과거를 회상하고 있다. 나는 6.25 동란때 서울에서 90일간 공산 치하에서 살았었다. 조부와 백부가 납치되어 가시고 집안이 풍비박산되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나의 뇌리에서 결코 지워질 수 없는 두 개의 사진이 있었다. 곳곳에 걸려있는 그 사진들은 나를 노려보는 듯 내려다보고 있는 김일성과 소련의 수상 스탈린 사진이 그것이었다. 그 후 소련하면 회상되는 여러 가지 중 후르시초프 수상이 UN 총회 연설 도중 구두를 벗어 탁상을 두드리는 사건과, 체코 프라하로 탱크를 앞세우고 무자비하게 쳐들어온 소련군에 맞서면서 자유를 갈구하며 봉기한 시민들의 구원을 요청하는 라디오 방송의 S.O.S 외침이 나의 귓전에 생생하며 기억에 남는다. 그래서 소련하면 뿔만 안 달린 마귀를 생각하면서 오싹해지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차이코프스키, 무졸스키, 림스키코르샤코프, 라흐마니노프 같은 주옥같은 음악의 작곡가들, 푸시킨, 도스엡스키, 톨스토이, 이반 뚜르게네프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문호들의 나라, 볼쇼이, 키로프 등 환상의 발레 이러한 러시아는, 나의 사춘기 시절부터 아니 어쩌면 나의 정신세계에 고향 같은 아련한 그리움이 들기도 하는 곳이다. 바로 그런 러시아로 나는 향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6ㆍ25 동란의 총성이 멈추고 소위 1ㆍ4 후퇴에서 서울 수복으로 서울로 돌아왔던 시절이 나의 본격적인 중학교 시절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 우리에게 문화라는 것은 미국 할리우드의 영화, 그리고 잿더미에서 막 시작한 번역문학이 전부라 할 수 있었다. 하기야 당시 명동에 있었던 시공관에서 어쩌다가 오페라가 공연되기도 했고, 신협극단이란 것이 있어 햄릿 같은 연극의 막이 오르기도 했다. 당시 나는 라트라비아타, 카르멘 같은 오페라에 입이 벌어지기도 했고, 명배우 김동원씨의 ‘햄릿’에서 몇 개의 대사를 흉내 내기도 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러나 역시 우리에게서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은 번역문학이었을 것이다. 당시 우리들은 우리에 앞선 세대의 사람들을 ‘꼰대’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들을 ‘봉건주의자’라고 몰아세웠다. 그러한 나에게 가히 충격에 가까운 감동, 흥분을 준 것이 러시아 작가 이반 뚜르게네프가 쓴 소설 ‘부자들(Fathers & Sons)’이였다. 주인공이 삼촌과 갖는 이념, 사상의 갈등과 논쟁은 내가 ‘꼰대’들에 향한 그들의 ‘봉건주의적 사고’를 대신해 퍼부은 맹공 같았고, 예쁜 여학생과 눈만 마주쳐도 공연히 가슴이 설레던 나의 수줍은 마음을 주인공의 애틋한 사랑이 대신하고 있는 듯 했다. 수줍음을 나누고… 더듬는 말로 (half words, half smile)… 그녀를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행복… 나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듯한 모습에 휘감는 두려움… 그리고 마침내 확인되는 사랑에서 갖는 환희…. 어쩌면 상상 속에서 나는 그 순수한 사랑(platonic love)의 주인공이였으리라. 그리고 어쩌면 그 한권의 소설이 나의 어린시절에 각인된 러시아가 그리움으로 아니 어쩌면 나의 마음속의 그리고 추억속의 고향으로 자리매김 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뿔은 안 달렸으나 소련이라는 악마의 나라 쪽으로는 눈을 감고, 어린시절의 아련한 향수를 느끼는 러시아로만 눈을 뜨고 지금 비행기에 앉아있는 것이다. 나보다 나이가 한참어린 H 여행사 미시즈 한이 내가 뚜르게네프의 소설이야기를 하자 빙그레 웃으면서 한마디 한다. “어머 이 선생님도 작가 이반 뚜르게네프를 좋아하시는군요. 사실 나의 여고 시절 우리 무용선생님이 무용은 안 가르치고, 교장선생님이 올까 파수를 세워 놓고 소설 이야기를 해주시는데 인기 최고였지요. 그 중 이반 뚜르게네프의 ‘첫사랑’이 최고 인기였고 당시 정말 우리 교실은 온통 그 이야기로만 시간을 보냈지요. 하지만 지금 내가 소설을 다시 읽는다면 그런 감동을 다시 느낄지요….” 비행기가 이륙한지 6시간이 지났다. 러시아 여행을 한 후, 으스스하고 춥고, 구름낀 흐미한 저녁, 음모, 배신, 고뇌 그리고 정욕이 담도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의 무대 같은 중세도시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발틱 3국도 방문할 나에게 가벼운 흥분이 다시 인다. “이제는 눈을 좀 부쳐야지.” 비행기 뒤 칸 스튜어디스에게 꼬마 버번위스키를 청했다. “6달러였지, 아마.” 주머니를 뒤지는 순간 “그냥 서비스로 드리죠” 미소 띤 스튜어디스가 꼬마 버번위스키 한 병을 건네준다. “공짜라… 어찌 시작이 좋은걸….” 버번 콕 칵테일이 따뜻하게 나의 뱃속을 내려간다. 나는 깊은 잠에 빠졌다.

2010-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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